한양대 인문관으로 향하는 길, 그중에서도 인문관 건물로 들어서기 직전 좌측 벽면을 들여다보면 누군가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바로 한결 김윤경 선생이다.
초상이 벽에 새겨진 지 오래지만, 아쉽게도 많은 학생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그냥 지나치곤 한다. 누군가는 김윤경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아는 이는 드물다. 김윤경 선생은 어떤 인물이었기에 한양대가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자 했던 것일까?

김윤경 선생은 조선어연구회의 창립 회원이자, 1964년부터 1969년까지 한양대 인문과학대학의 학장을 지냈다. 조선어연구회는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어학회, 한글학회의 전신이다. 조선이 일제에 의해 식민지로 있던 시절 선생은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돼 고문을 당했다. 혹독한 세월 속에서도 그는 '우리 말본', '고가 연구', '조선어 사전', '조선 문자급 어학사' 등 굵직한 네 권의 명저를 남겼다.
그가 처음부터 국어학의 길을 걸었던 건 아니다. 학창 시절, 그는 수학에 깊은 흥미를 느끼고 이를 전공하고자 했다. 그랬던 그가 국어를 사랑하게 된 것은 주시경 선생의 국문법 강의를 들으면서부터 였다. 주시경 선생은 수업에서 '한글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훌륭한 과학적 조직을 가졌으며, 외국인이 우리보다도 먼저 그 가치를 잘 인식하고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면서 '도리어 우리가 우리 문자의 가치를 알지 못함은 크게 섭섭한 일이다'고 했다. 수업을 들은 김윤경 선생은 크게 감격을 받아 부지불식간에 국어 연구로 마음을 돌렸다. 그가 주시경 선생의 수업을 들었던 해가 1911년, 나이로는 18세였다.
이후 한결은 주시경 이후 펼쳐진 세 가지 말본 체계 중 하나인 분석적 체계를 확립했다. 그는 '말은 종합적인 데서 분석적인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언어관을 기반으로 문법 체계를 분석적으로 정립했으며, 그의 연구 저서 '조선말본'(1926), '한글말본'(1946), '나라말본'(1948)은 우리 국어학사의 근간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1942년, 49세의 나이로 선생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인해 체포됐고, 함경남도 홍원 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함께 수감됐던 동료 무돌 김선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42년 홍원 경찰서에서 환산, 한결, 나는 언제나 함께 도장으로 끌어내 고문했다. 어느날 우리 셋은 물먹는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맨 앞에는 환산이 가고 그 뒤에 한결이 가고 나는 고문 당할 것이 두려워 벌벌 떨며 두 분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환산, 한결은 얼굴에 불안한 표정은 있으나 태연했다. 나는 여기서 또다시 한결의 성자다움을 보았다.'
한글을 지키고자한 그의 뜻은 해방 이후에도 굳건했다. 김윤경 선생의 동료였던 장덕순은 한글파동 당시 일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김윤경 선생은 불의와 추호도 타협하지 않으면서 대의명분이 서는 옳은 일에는 의연히 행동으로 나서지만 항상 온유하고 순하다. 자유당 집권 당시 이대통령이 한글 맞춤법을 없애자는 소위 한글파동이 있을 때였다. 선생을 뵙고 의견을 여쭈었더니 '내 목숨을 걸고 싸워야지요'하면서도 얼굴엔 순진하리만큼 앳된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이 결의는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곧 행동과 연결된다는 것은 그의 행적으로 보아 조금도 의심할 바가 없다.'
'한결'이라는 호는 그에게 단지 이름이 아니라 삶의 방식 그 자체였다.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단 한 번의 결강이 없었으며, 심지어는 딸의 결혼식 날에도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 시간의 엄수는 물론, 성적을 매기는 일에도 단호했다. 돌처럼 완고하다고 해서 학생들 사이에서 '석두'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철두철미함 속에는 늘 타인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듣는 온화함이 있었고, 타당한 논리라면 언제나 기꺼이 수긍했다.
한결 김윤경 선생은 1963년, 70세의 나이로 한양대 교수로 피임됐다. 그 다음해인 1964년부터 한양대 인문과학대학 학장으로 지냈다. 그로부터 5년 후 1969년에 한양대와 관련된 산업시찰 여행 도중에 부산에서 별세했다.
한결같은 의연함으로 국어를 연구하고 또 사랑했던 김윤경 선생. 그가 지키고자 했던 건 단지 한글이 아니라 이 땅의 정신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그가 남긴 흔적 위에서 언어를 배우며 살아간다.
참고 문헌 :: 한결 김윤경 선생 기념사업회, <한결 김윤경 선생>, 보성문화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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