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 제치고 받은 3년 연속 가수왕 상패 “오빠 아직 살아있다”

가수 남진(영화학과 64) 솜사탕토토  ⓒ조선일보
가수 남진(영화학과 64) 동문  ⓒ조선일보

10월 10일 자 <조선일보>는 가수 남진(영화학과 64) 동문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남 동문이 ‘MBC 10대 가수 청백전’ 가수왕 상패를 두고 벌인 나훈아와의 경쟁은 1970년대 한국 대중가요사에 활력을 불어넣은 ‘보물’이었다. 그는 “수백억을 들여도 결코 만들 수 없는 관계가 자동으로 주어졌으니 훈아와 나, 우린 참 운이 좋았죠. 역사적 경쟁 관계로 꼽히며 가요계에 재미를 더했으니까요”라고 회상했다.

남 동문의 최전성기 시절은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도 불린다. 엘비스를 닮은 그의 무대 의상, 외모, 다리를 달달 떠는 춤, 노래 실력도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그를 가수의 길로 이끈 노래는 팝송이었다. 그는 스스로에겐 엘비스의 복장이 ‘음악적 뿌리’의 표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트로트만이 아닌 팝송 등 여러 장르를 잘 부른 게 내 인기의 비결이었다”고 회상했다.

2집 성공으로 승승장구했지만 남 동문은 그해 갑자기 해병대에 입대했고, 청룡부대를 거쳐 더 넓은 세계를 보기 위해 베트남전 파병을 자원했다. 그렇게 떠난 월남의 전장은 “자고 일어나면 한두 놈씩 없어지고 곳곳에 실탄과 수류탄이 널린 혹독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고 편하게만 살았던 내게 세상 보는 눈을 달라지게 했다”고 했다.

월남에서 제대한 직후인 1971년 남진과 나훈아 모두 리사이틀을 열면서 두 사람의 라이벌 구도가 본격적으로 조명받기 시작했다. 이어 3년 연속 남 동문은 MBC 최고 가수상을 휩쓸고, 그를 뒤쫓는 나훈아와의 경쟁 구도가 화제가 됐다. 그의 1971·73년 TBC 남자가수 대상 수상도 1972년 한 차례 나훈아의 수상 이후 탈환한 것으로 팬들의 응원전을 더욱 가열시켰다. 그의 표현으로 “우리가 저물고, 조용필이 뜨던 1980년대”에조차 언론사들은 두 사람을 비교한 표를 첨부해 칼럼을 내놓았다. 남 동문은 “참 기가 막히게 맺어진 라이벌”이라 표현했다.

가수뿐 아니라 영화계에서도 자신의 곡 이름을 딴 작품 등 60여 편 넘게 출연한 남 동문의 인기는 국내 최초로 ‘오빠 부대’를 탄생시켰다. 그가 1972년 남이섬에서 7,000여 명과 가진 팬미팅은 국내 기록된 ‘최초의 팬클럽 행사’다. 그는 특히 “팬들로부터 기념품들을 기증받아 전남 고흥군에 ‘남진 가요기념관’ 설립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내 소장품들은 정작 내 손에 하나도 없어요. ‘가수 남진’의 60년 인생은 결국 모두 팬들이 ‘삶’으로 만들어 준 것이죠. 이제는 그 삶을 잘, 멋있게 마무리하는 게 내 마지막 소명입니다”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토토사이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