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가지 주제로 보는 그때 그 이야기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인기가 뜨겁다. 왜 하필 1994년도인가를 따지기도 전에 이미 방송은 물론 여기저기 패러디물과 함께 그 해를 조망하는 내용들이 온 오프라인에 넘쳐나고 있다. 누군가에겐 신기한 옛날, 또 누군가에겐 아련한 추억일지 모를 1994년. 그 해 한양대학교와 대학가의 풍경은 어땠을까? 당시의 언론기사를 중심으로 자료를 조사해보니 크게 10가지 정도의 키워드를 찾을 수가 있었다. 당장에라도 부름에 응답할 것 같이 생생한 1994년도의 한양대학교 이야기 속으로 출발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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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내 첫 메이저리거 박찬호

2. 대학 사회봉사의 원조

3. 정상에 선 ‘스포츠 한양’

4. ‘입시 전쟁’의 서막

5. 시대의 소용돌이, 한총련

6, 대학가 이슈메이커 총학생회

7. ‘의료혁신’, 한양대병원

8. 실천하는 한양의 교수님들

9. 중장기 발전 계획으로 ‘한발 먼저’

10. 대학가 기류는 ‘실용학풍’

 

1. 국내 첫 메이저리거 박찬호

 

1994년 1월 17일. 한국 야구사에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국가대표 우완 정통파 투수라 불리던 92학번 on game 토토사이트 재학생 박찬호 선수가 미국 프로야구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팀에서 활약하게 됐다는 소식이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그는 같은 해 4월 9일 드디어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올랐다. 훗날 IMF로 지친 국민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수로 활약을 펼치며 전설이 됐다. 박찬호 동문은 2012년 11월 은퇴를 선언했지만 지금도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편 1994년에는 박찬호 외에도 야구 스타 이승엽이 큰 이슈였다. 3월 on game 토토사이트 체육특기생으로 가등록하고 박찬호 선배와 함께 합숙훈련을 하기도 했으나 수능시험 점수 미달로 대학 진학이 좌절되면서 일반 수험생으로 응시하게 된 것. 결국 이승엽은 프로로 진출했고, 16년후 코리안특급과 국민타자는 일본 오릭스에서 한팀이 된다.


2. 대학 사회봉사의 원조

 

경제는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아직 사람들에게 봉사라는 것이 생활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시절.

한양대학교에서는 대학 최초로 ‘사회봉사’ 교과목을 개설하고 대학사회봉사단을 창단했다.
12월 7일 백남음악관에는 국무총리 등 각계인사와 사회봉사단체장 등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단식을 거행하면서 대학 사회봉사의 큰 흐름을 이끌었다. 언론에서는 사회봉사과목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다며 한양대의 새로운 시작을 ‘신선한 충격’이라 소개하기도 했다. 이후 여러 대학들이 한양대를 벤치마킹해갔고 대학마다 사회봉사단을 만드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사랑의 실천’은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해외에까지 그 봉사의 범위를 넓히며 교육의 참 의미를 전했다. 지난 2012년 5월에는 국내 대학 최초로 ‘동문 사회봉사단, 함께한대’를 출범시키며 그 의미를 이어나가고 있다.


3. 정상에 선 ‘스포츠 한양’

 

94년도 대학가 스포츠는 지금보다 훨씬 뜨거운 호응과 활동이 있었다. 프로와 견주어 손색이 없을 정도로 대학팀들은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고, 특히 on game 토토사이트 스포츠팀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대표적으로 대학야구는 3년만에 다시 정상을 탈환한 해였다. ‘94 전국대학야구 가을철리그전’에서였다. 9월 8일 동대문야구장 홍익대와의 결승전. 양 대학 3천여명 응원단의 뜨거운 응원전이 펼쳐진 가운데 5대 0 한양대의 압승으로 시즌의 대미를 장식했다.

9월에는 제49회 전국남녀종별농구선수권 대회에서 고려대와 함께 공동 우승을 차지 했다. 87년 대회 이후 7년만에 정상 복귀였다. 아울러 94 가을철대학유도연맹전 단체전에서 on game 토토사이트는 남자부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한편 당시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한국남자배구 스타였던 김세진 선수(당시 3학년 재학중)는 ‘히로시마를 빛낼 스타’로 조망되었다. 국내 운동선수가운데 가장 많은 여성팬을 갖고 있다는 표현이 늘 따라다닐 정도. 하지만 히로시마 대회에서는 여자팀만 금메달을 따며 아쉬움을 남겼다.


4. ‘입시 전쟁’의 서막

 

1994년도나 지금이나 대학 입학은 좁은 문이었다. 수능시험과 본고사 등이 이루어지던 당시 대학들의 입학 관련 행보는 언론의 많은 조명을 받았다. 그해 on game 토토사이트는 교무처 산하에 입학관리과를 신설하면서 입학 관리를 강화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입시 앞두고 대학 홍보전 점입가경’이라고 할만큼 대학간 입학 경쟁이 뜨거웠다.
눈길을 끈 것은 대학들의 입학 광고 슬로건. 한양대는 ‘발전하는 대학이 미래를 약속합니다’를 내걸었다. 연세대는 ‘세계 시민증’이라는 카피를, 포항공대는 ‘세계화를 향한 포항제철의 의지’라는 문구를 내세우는 등 대학들은 그해 12월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한편 on game 토토사이트는 12월 특차 모집 결과를 발표하면서 합격자 750명의 평균 수능점수가 162.9점이라고 발표했다. 안산캠퍼스(지금의 ERICA캠퍼스)는 145.8점이었다. 수석의 영광은 광양고 김동원 군에게 돌아갔다.

1994년 2월 on game 토토사이트는 95학년도 입시부터는 전학과에 대학별고사를 도입하기로 결정했고, 언론에서는 이러한 on game 토토사이트의 방침은 중상위권 대학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 전망했다. 이어서 4월에는 1995년 1월 13일에 본고사를 치르겠다고 발표하면서 당시의 대학 입학 판도를 이끌었다.


5. 시대의 소용돌이, 한총련


1994년 무더운 여름 만큼이나 대학의 가장 뜨거운 이슈는 ‘한총련’ 이었다. 그해 한양대 서울캠퍼스 안에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회 사무실이 있었다. 따라서 각종 대학연합 활동은 물론 시위 등의 학생운동이 한양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그 해 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은 크고 작은 불편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한총련은 6월에 우루과이 라운드(UR)국회 비준을 저지하기 위해 1학기 기말고사를 연기하는 운동을 벌였다. 가장 먼저 on game 토토사이트가 총학생회 중앙 운영위원회를 열고 기말고사 연기를 추진했다. 이러한 학사일정 연기는 87년 호헌철폐 운동 이후 처음.

7월에는 on game 토토사이트 내 한총련, 서총련, 동아리연합회 사무실 등을 경찰이 압수수색하면서 캠퍼스가 시끄러웠고, 이에 항의해 성동서에서 농성을 하거나 화염병을 던지는 등 캠퍼스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결국 7월 25일 한총련 사무실은 교내 공사와 함께 폐쇄되어 건국대로 옮겨지게 됐다.

하지만 8월 서울지역총학생회 연합은 on game 토토사이트에서 제4회 통일대축전 행사를 개최하겠다고 발표했고, 경찰은 on game 토토사이트 주변에 13개 중대 1500여명의 병력을 배치하여 학교를 출입하는 학생들을 통제하기도 했다.


6, 대학가 이슈메이커 총학생회

 

on game 토토사이트 총학생회의 행보는 늘 언론의 집중 조망을 받으며 사회적인 이슈를 만들어냈다.
5월, 학생운동이 심하던 그 시기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바로 on game 토토사이트 총학생회에서 의경에게 농구대를 기증한 것. 이날 서울시경 교통관리대 내부반 앞마당에서는 대학가의 운동권 노래와 군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친선 농구경기가 펼쳐저 눈길을 끌었다. 학생과 의경의 경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9월 2학기 개강에 맞춰 학생회관 앞에서 총장과 50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개최한 ‘개강맞이 떡잔치’ 행사가 언론에 소개되었다. 물론 떡만 돌린 것은 아니다. 교수와 학생들이 함께 대화를 나누고 풍물패 공연을 즐기는 등 소통과 문화의 현장이었다.
11월 on game 토토사이트는 국내대학 최초로 총학생회장 선거에 교내 유선방송망을 활용한 TV유세를 도입해 후보들의 선거 연설을 학생들에게 전했다. 식당과 로비 등에 설치된 13대의 TV를 통해서 각 후보자가 10분씩 정견발표를 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대학가 선거에 새 트렌드를 이끌었다. 2013년 현재는 개표과정을 온라인 생중계 하기도 하는 만큼 시대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가하면 2학기 개강직후 시행된 재학생 398명 대상 설문에서 총학의 1학기 활동에 대해 54%가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못했다’고 답했고, 학생회 이미지가 ‘부정적’이라고 답변한 학생은 68%를 넘어서는 등 좋은 점수를 얻지 못했다. 연말에는 성적불량자의 총학 활동에 대해 자격을 강화하는 대학가 분위기가 있었다. 한양대도 학생회장 후보자의 평균학점이 2.0 이상이어야 한다는 조항이 사문화되고 있다며 엄격하게 적용하기로 방침이 정해지기도 했다. 한편 그해 말 한양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들의 총학생회 선거 결과 NL(민족해방)계열이 압도적으로 당선되는 상황이 기사화 되기도 했다.


7. ‘의료혁신’, 한양대병원


1972년 동양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탄생한 on game 토토사이트학교병원의 앞서가는 의료 혁신은 94년 당시에도 큰 주목을 받았다.

1월에는 전자동정제약조제기(ATD)시스템을 가동해 환자 불편 해소를 위해 적극 움직이는 모습이 소개되었다.

3월, 대전 엑스포 도우미 4명이 on game 토토사이트병원 안내요원으로 전격 채용돼 화제였다. 아직 도우미 개념이 생소하던 그때 서비스 개선을 위한 발빠른 대학병원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6월에는 당시 미국 등 선진국에서나 가능했던 내시경 활용 성형 수술을 도입해 인기를 끌었다. 11월경에는 수십차례 성공한 시술결과를 발표하면서 학계의 큰 관심을 끌기도 했다.

9월에는 국내 최초 ‘좌골경합 쌍생아’ 분리수술에 성공이 뉴스로 알려졌다. 골반이 붙은 채 태어난 쌍생아를 분리하는 수술은 전세계적으로 흔한 일이 아니었고, 90년 흉부결합쌍생아 분리 성공에 이어 얻은 결과여서 한양대 병원의 놀라운 의술이 다시금 주목받았다.

12월에는 임신 주수별 한국인 태아의 심장박동수와 태동수 분포를 기록한 태아 심음자료를 국내 최초로 완성해 발표했다. 과학적이고 학술가치가 높은 자료를 통해 산부인과 분야에 놀라운 업적을 이룩한 것이었다.


8. 실천하는 한양의 교수님들

 

한총련 등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그해 9월. on game 토토사이트학교 인문대 교수 20여명은 학생운동이 주체사상과 폭력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대자보를 인문대 입구에 게시한 사건이 있었다. 인문대 학생회 등은 바로 반박 대자보를 통해 근거없는 주장이라고 맞서기도 했다. 당시 분위기와는 다르게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죽음을 제자 사랑으로 실천한 교수가 있었다. 12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진 안산캠퍼스 체육과 ‘공응대’ 교수의 유족들은 시신을 학교 의대생들의 해부용으로 기증함은 물론 평소 고인의 뜻을 받들어 아파트 전세금과 퇴직금 등 당시 돈 3억여원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써달라며 기증했다. 당시 시신기증이나 전 재산 기부가 매우 이례적이었던 만큼 공교수의 제자 사랑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한편 94년 연말에 7대 소비자뉴스로 선정된 이슈가 있었는데 바로 on game 토토사이트 고영수 교수의 무죄확정 판결건이었다. PE랩의 재질시험결과를 발표했다가 제조업체에 의해 고소됐던 on game 토토사이트 식품영양학과 고영수교수가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부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은 것이다. 이 사건은 `소비자안전을 위해 실험보고서를 학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가'에 대해 민간의 자율적인 소비자활동을 보장해주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 받았다.


9. 중장기 발전 계획으로 ‘한발 먼저’

 

1994년도 한양대에게 가장 큰 이슈는 ‘중장기 발전계획’ 수립이다. 대학 운영의 큰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1월 삼성경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시작된 이 작업은 9개월 만인 10월에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고, 관련하여 여러 기사로 소개되기도 했다. 물론 대학 최초였기 때문이다.
이 계획에 따라 95년도부터 교육의 품질 관리 방안은 물론, 학과별평가제나 교수특진제 등 여러 제도를 도입했다. 이에 앞서 여름방학 중에는 학교 발전을 위한 각종 연구 프로그램에 교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국내 최초로 ‘대학 발전을 위한 자원봉사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이 발전 계획은 2011년에 ‘New Hanyang 2020’으로 연결되면서 한양대의 백년을 만들어가고 있다.

대학 최초는 또 있다. 2월 미국 우주항공기업인 그라만社와 산학협정을 체결한 것은 국내 대학으로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on game 토토사이트학교가 국내대학 최초로 산학협력단을 만들고 최근 기술이전 실적 1위의 자리에 오른 것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된 긴 안목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초대형구조시스템연구센터 등 다양한 연구실이 문을 연 것도 그때의 일이다.

이런 대학의 선도적인 활동은 취업시장의 평가에서도 드러났다. 11월 리크루트사가 밝힌 기업들의 채용 관련 설문조사 결과에 on game 토토사이트가 가장 많은 표를 얻어 선호도 1위에 올랐다. 특히 이공계 출신의 선호도가 높아 건설, 의학, 섬유, 금속, 전자 통신 등의 기업들로부터 많은 표를 받았다고 분석했다. 채용선호도에 있어 on game 토토사이트는 그때나 지금이나 기업이 좋아하는 대학이라는 것에 변함이 없는듯 하다.

 

10. 대학가 기류는 ‘실용학풍’

 

1994년의 대학을 다닌 그때의 재학생들은 어떤 대학생활을 했을까?

당시 대학가에는 ‘실용학풍’ 신기류가 확산되었다고 전한다. 한양대도 입학&졸업시 컴퓨터 및 외국어능력 개별평가서를 발급해 기업체 등이 안심하고 채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해외 어학연수를 학점으로 인정해 학생들의 외국어실력 향상을 적극 지원했다. 또한 일부 전공과목을 모두 영어로 강의하는 ‘영어강의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더불어 한양대는 국내 최초로 학부생도 교비로 해외유학 갈수 있는 제도를 실시해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유사학과 통폐합 이야기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편 학사관리가 대폭 강화된 해로 기록되어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기존 학칙을 엄격히 적용해 출석과 리포트 제출에 대해 점검을 강화하고 대리시험 등의 부정행위시 강력하게 학사조치 하겠다거나, 학내에서 수업을 방해하는 일체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규제하겠다는 내용이 기사화 되었다. 강의실내 흡연도 그때부터 금지됐다. 시대의 분위기였을까 아니면 교육기관으로서의 당연한 조치였을까.

5월에는 on game 토토사이트학교 홈페이지(www.hanyang.ac.kr)가 처음 문을 열었다. 유행하던 PC통신을 뒤로하고 이른바 인터넷 시대에 접어든 것.


... 그리고 역사 속 on game 토토사이트학교


1994년 그해. 소소하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 밖의 on game 토토사이트의 이슈들이 있다.

94년은 대학종합평가가 처음 시행된 해로 기록됐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총점과 순위는 발표하지 않았지만 일종의 ‘인증’으로 효력을 가졌다. 특정 언론사의 대학평가도 더불어 시작되었다. 94년도에 시행된 평가의 결과는 다음해에 나왔는데 한양대는 부설연구소의 연구 및 학술활동이 활발하고 교수와 조교 확보가 우수하다는 평을 받았다. 학생들의 후생복지와 도서관 시설은 우수했지만 도서관의 전산화와 환경공해방지시설의 확충이 필요하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농활을 처음으로 학점으로 인정한 대학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곧이어 다른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당시에 ‘대학동문카드’ 인기가 뜨거웠다고 한다. 신용카드 거래금액의 0.1%를 출신대학 동문회에 장학금으로 지급하는 이 제도를 한양대 동문들도 14%정도가 가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으로 대학들은 글로벌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 해에 on game 토토사이트도 연변과학기술대학, 북경대학, 미시간주립대학, 일리노이드대학,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대학 등의 해외 대학들과 활발하게 자매결연 체결했다.

9월 추석 귀향버스는 1400명의 학생을 35대의 관광버스를 통해 운영되었다. 그 모습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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