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열사들의 쉼터, 우리토토사이트 라이브 민주공원

 

   

 

‘브나로드’. 러시아 말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지식인 계층인 대학생들이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 대의를 위해 싸운다는 의미로 더욱 많이 사용됐다. 1980년대는 암울했다. 군부 독재의 시대였다. 대학생들은 학기 중에 강제로 끌려가 군사교육을 받아야 했다. 민주화의 목소리를 내면 총칼이 앞을 막아 섰다. 빠른 산업화로 인해, 노동자들의 생활은 더욱이 열악해져만 갔다. 대학생들은 거리로 혹은 일터로 나갔다. ‘브나로드’의 실천이었다. 거리로 나와 민주화를 부르짖었고, 일터로 나가 노동자들과 함께 숨쉬며, 그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웠다. 암울한 시대 상황에 맞서 싸운 대학생들. 우리대학 인문대 밑 공터에 그들을 위한 민주공원이 새단장을 했다. 비록 조그마한 공간이지만, 시대의 상황에 맞서 싸운 행동한 지식인을 기리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민주 열사들을 기리는 민주공원

 

 

   


우리토토사이트 라이브에 민주공원이 조성되게 된 계기는 토토사이트 라이브생활 중 강제징집(자의에 관계없이 강제로 군대에 끌려가게 되는 것) 되었다가 의문사를 당한 故 한영현 군(기계.81)의 추모비를 세우게 되면서이다. 우리토토사이트 라이브 기계공학과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할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었다. 학교에 입학한 뒤, 교내 동아리인 민속문화 연구회에 가입해 학생운동을 시작한 한군. 1982년 부천에서 야학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83년에는 야학에서 활동을 함께하던 선배의 학생운동 조사과정 중 한 군의 이름이 나와 성동경찰서로 끌려가 조사를 받으며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해 4월 경찰서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은 한 군은 행방불명 되고 만다. 군대에 강제 징집됐던 것이었다. 결국 한 군은 군대에서 의문사를 당해 3개월 만에 싸늘한 시체로 돌아오게 된다. 우리 근현대사의 아픈 단면이다.

 

한 군 외에도 우리토토사이트 라이브의 수많은 학생들이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이 중 아주 열정적으로 참여한 학생이 있었다. 바로 故 최응현 군(섬유.87)이다. 최 군도 한 군과 함께 현재 민주공원에 헌액 되어 있다. 최 군은 1988년 전방입소 반대 특위 부위원장으로 활동 중에 구속되어 11월에 집행유예로 출소했다. 전방입소는 당시 토토사이트 라이브생들을 대상으로 1주일 동안 강제 소집해 휴전선 근처 전방부대로 배치해 군사훈련을 받게 하던 제도였다. 흔히 학생들이 모여 학생운동을 하는 것을 막기위해 사용된 정책이었다. 가정형편 상 휴학과 복학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최 군은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지난 1990년 우리토토사이트 라이브 건물에서 민주화 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점을 자책하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하여 생을 달리했다.

 

이렇게 민주화 과정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열사들의 추모비는 우리토토사이트 라이브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다행히 신본관 공사를 진행 하면서 현재의 위치에 추모비를 모아 지금에 이르게 됐다. 평생을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하다가 지난 2010년 암으로 생을 마감한 故 김헌정 동문(경제.83)의 추모비 설립을 계기로 표지판을 붙이는 등 새단장을 했다.

 

우연히 민주공원을 찾은 정현지 양(인문대·철학 3)은 “158계단을 매일 오르는 인문대생이지만 기념비가 있었다는 것만 알았지 그것이 민주열사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은 모르고 학교를 다녔다. 이번 민주공원 단장을 통해 이곳이 민주열사들을 추모하는 곳임을 알게됐다”며 “앞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추모공원을 바라보며 민주열사들의 희생을 되새기겠다”고 말했다.

 

민주화와 노동자를 위한 삶을 살다간 이, 故 김헌정 동문

 

   

김헌정 동문(경영.83)이 우리대학에 입학한 것은 지난 1983년. 우리대학 장학생으로 상대(현 경금대)에 입학한 김 동문은 고향에서 수재로 이름이 높았다. 김 동문의 고향이었던 동두천에서 제일가는 천재라 소문이 자자했다. 온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우리대학에 입학한 김 동문. 그의 대학생활은 파란만장 했다. 우리대학에 와서 故 리영희 전 교수(사회대·신문방송)의 가르침을 받고 대학생의 사회참여에 눈을 뜨게 된다. 재학시절 동안 총학생회에 들어가 독재정권 타도와 민주화를 부르짖었다.

 

졸업 후 김 동문은 노동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당시 많은 토토사이트 라이브생들이 노동자와 함께 하겠다며 노동현장으로 갔다. 울산과 창원, 부천과 구미의 공장으로 갔다. 하지만 김 동문은 고향인 동두천으로 향한다. 동두천에서 김 동문이 한 일은 환경미화원이었다. 당시 노동운동이라 함은 으레 공장 노동자를 생각했던 당시의 통념과는 사뭇 다른 행보였다. 수많은 토토사이트 라이브생들이 공장 노동자에게 관심을 가질 때, 김 동문 열악한 환경에 방치되어 있는 환경미화원들에게 주목한 것이다. 김 동문은 소외된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꾸준히 싸워왔다. 노동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지난 1999년 노무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하지만 노동운동 때문에 간 수감 횟수만도 4회. 감옥을 제집 드나들듯 한 아픔도 있었다.

 

지난 2010년, 암으로 생을 다할 때까지 김 동문은 노동현장을 지켰다. 김 동문의 지기들은 고인을 순박한 미소와 듬직함을 가진 돌쇠풍의 넉넉한 학생이라 기억한다. 김 동문과 함께 노동운동을 함께한 지기인 고형권 동문(신문방송.83)은 “자신의 앞가림을 때문에 노동운동을 포기한 친구들이 많았다. 하지만 고인은 대학시절의 순수함과 열정과 헌신을 고스란히 간직한 인물이었다”며 “세상이 다 변하더라도 그 자리를 지켜주리라 기대했던 사람이 김헌정 학형이었으며, 실제로 죽는 순간까지 노동현장을 지키며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고 고인을 회고했다.

 

   

故 김헌정 동문 민주공원에 헌액 되다

 

지난달 29일 김 동문의 추모비 건립 행사가 있었다. 이로써 민주공원의 헌액된 민주열사의 수는 4명으로 늘었다. 노동운동에 일생을 바친 김 동문을 위해 노동운동계의 각계각층이 모여 기념비를 세우며 김 동문을 기렸다. 조그마한 비석이었지만, 고인을 기리는 그들의 뜻은 결코 작지 않았다. 행사에는 약 100여명의 인원들이 참여해 모교에서 영원히 고인의 이름이 영원히 남길 기원했다.

 

김 동문이 떠난 지 3년이 넘었지만, 고인의 뜻을 이어 받기 위해 동문들이 발을 벗고 나섰다. 학교 측도 적극 나서 고인의 뜻을 기렸다. 추모비 건립을 주도한 고 동문은 “평소 실천하는 지식인이었고, 노동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김헌정 학형의 삶을 되새기기 위해 추모비를 건립하게 됐다. 모두를 위해 세상을 물들이고 떠난 그의 삶이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추모비를 건립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이번 추모비 건립이 계기가 돼 해마다 고인의 기일에 맞춰 우리대학에서 매년 추모제를 지낼 예정이다. 단순히 일회성으로 고인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고인의 뜻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다. 고 동문은 “동문들과 고인이 몸담았던 노동조합 사람들과 함께 고인을 기리는 추모제를 할 예정이다”며 “고인이 남긴 뜻을 평생 기억하려 한다”고 밝혔다.

 

 

 

손경원 학생기자 son7629@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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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진 사진기자 flowkj@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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