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가 임세경(성악과 94) 동문

지난 4월 세계적인 소프라노 임세경 씨가 국립오페라단의 ‘팔리아치&외투’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해 오페라 애호가들의 귀를 호강시켰다. 세계 오페라 무대에서 최고의 전성기라는 찬사를 듣고 있지만, 여전히 소리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그는 성악계 역사의 새로운 장을 써내려가는 중이다. 글. 박영임 / 사진. 임세경·안홍범


 

▲ 성악가 임세경(성악과 94) 동문

1년 만에 찾은 한국 무대


소프라노 임세경 씨를 만난 건 국립오페라단의 ‘팔리아치&외투’ 공연을 마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수개월간 연습한 열정과 천부의 재능을 여한 없이 무대에서 불사른 예술가는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주체할 수 없는 환희에 여전히 달뜬 표정일까, 아니면 모든 에너지를 연소해 심연의 바닥에 침착한 모습일까. 의외로 임세경 씨의 얼굴에는 지난밤 화려한 무대의 프리마돈나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일상성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난 후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는 임세경 씨. 유럽 첫 무대가 2004년이니 데뷔한 지 10년이 넘었건만 여전히 무대에 대해 겸허한 마음이다.
“원래 공연을 마친 후에는 무대에서 어떻게 노래했는지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불러보며 어떤 점이 좋았는지, 다음에는 어떤 점을 보완해야 할지 되뇌다 밤을 새곤 합니다.”
오랜만에 한국 무대에 선 임세경 씨는 사실주의 오페라 3대 걸작으로 꼽히는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와 푸치니의 ‘외투’를 엮은 ‘팔리아치&외투’에서 화려한 유랑극단의 배우와 가난한 청소부 여인이라는, 성격이 다른 1인 2역을 소화해 발성이 견고하고 감정 표현이 압권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평소 비극적인 역할을 많이 맡다가 ‘팔리아치’의 발랄한 넷다를 연기하며 저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역으로 영역을 넓혔으니 유럽이나 미국 무대에서도 새로운 제안이 많아지길 기대합니다.”
 

한국인 최초 주역으로 아레나 디 베로나에 서다


임세경 씨에게는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한국인 최초로 ‘아이다’의 주역을 맡았다는 영광의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은 매년 6~8월 오페라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의 탄생을 기념해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오페라 축제로, 많은 성악가들이 이곳에서 명성을 쌓았다. 특히 고대 로마시대의 야외 원형 경기장인 아레나 디 베로나에서 공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임세경 씨는 2015년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에서 한국인 최초로 아이다 역을 맡아 열연했다.
“1만 6,000석의 아레나 디 베로나 무대를 보니 앞이 깜깜하더군요. 저 거대한 무대에서 작은 체구의 제가 보일까, 제 목소리가 들릴까 걱정했어요. 10년 이상 무대에 선 동료가 눈을 딱 감고 첫 소절을 시작하면 된다고 말하더군요. 너무 긴장했는데 막상 무대에 올라 조명을 받으니 고요한 적막감이 감돌고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함께 거짓말처럼 마음이 평온해졌어요. 그래서 안정감을 찾고 무대를 즐겼습니다.
꿈의 무대에 데뷔하는 소프라노의 흥분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임세경 씨는 2015년 공연을 시작으로 그 후 매년 페스티벌에 초대받았다. 지난해는 먼저 제안받은 스위스 아방쉬 페스티벌에 출연하느라 고사했지만, 올해는 ‘아이다’, ‘나비부인’에 이어 ‘토스카’, ‘나부코’까지 제의를 받아 최종 출연 작품을 조율 중이다.
“최초라는 수식어보다는 저의 발전한 모습을 인정받았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노래를 할 만하니 무대가 끝나 아쉬웠어요. 이번에는 여러 회 출연하기 때문에 좀 더 여유를 갖고 제가 가진 가장 좋은 빛깔을 보여주고 싶어요.”
 

뒤늦게 도전한 성악가의 꿈

▲ 오스트리아 빈 슈타트오퍼에서 호연한 ‘나비부인’의 한 장면

임세경 씨는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 외에도 지난 2015년과 2016년 세계 5대 오페라 극장으로 꼽히는 오스트리아 빈 슈타트오퍼(빈국립극장)에서 ‘나비부인’을 호연했는데, 이 극장에서 한국인 소프라노가 주역으로 선 것은 조수미, 홍혜경에 이어 세 번째다. 지난 1월에는 플라시도 도밍고가 지휘한 ‘토스카’에 출연하는 등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소프라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대학 시절 그의 존재감은 의외로 미미했다.
“성량은 좋았지만, 노래를 그리 잘 하는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뭐든 좀 늦은 편이거든요.”
게다가 대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1년 넘게 중환자실을 지켜 학교생활을 제대로 할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를 잃고 졸업을 한 후에는 성악가의 꿈보다는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의무가 우선했다. 그렇게 졸업 후 3년간 피아노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모은 돈으로 이탈리아 유학을 결심했다. 유학은 엄두도 내지 못할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손으로 돈을 버니 오히려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의지가 분연히 일어섰다.
“제가 노래를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제 노래에 감동했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어요. 테크닉은 부족해도 마음을 전하는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닐까, 오페라의 본고장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면 나의 소리가 어떻게 발전할까 궁금했어요. 그래서 딱 3년만 공부하겠다며 어머니를 설득해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오페라의 변방 한국에서 온 소프라노가 오페라의 성지 이탈리아에 모인 세계 각국의 소프라노들 틈에서 어떻게 존재감을 빛낼 수 있었을까. 처음에는 조바심도 나고,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받는 차별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우연히 개인적으로 사사받은 한 마에스트로에게 ‘남들보다 잘 하려고 하지 마라. 남들과 다르면 된다’라는 소중한 가르침을 얻었다.
“세상에 저와 똑같은 목소리는 없잖아요. 외국인이라고, 약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개성을 살리면 되는 거죠. 그때부터 무대가 두렵지 않았어요. 후배들도 대학 시절에 남들과 경쟁하기보다는 자신의 개성을 찾는 데 시간을 투자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성악과 후배들이 세계 무대에 서길 바랍니다.”
 
▲ 국립오페라단 작품 ‘메피스토펠레’에서 열연하고 있는 모습
임 동문은 "무대를 이겨야겠다, 그래서 더 큰 무대에 서겠다는 욕심이 노래에 스며들면 관객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하는 사람은 무대에 부정적인 에너지를 실으면 안 돼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영혼이 맑아야 합니다." 라고 말한다.
 

나의 전성기는 이제 시작


서양의 소프라노들보다 늦게 데뷔한 임세경 씨는 마흔 살이 되어서야 유럽의 유명 무대에 서며 한국에까지 알려졌다. 그는 늦깎이 성악가로 현재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는 찬사를 듣고 있다.
“저는 지금 시기가 딱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대 초반에 큰 무대에 섰다면 발성의 완성도나 심리적 부담감 때문에 오래 서지 못했을 거예요. 모든 영역대의 소리를 소화하며 성대가 가장 건강할 때라는 점에서 전성기는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음악적 완성도 측면에서는 아직 전성기라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더 발전해야죠. 베르디, 푸치니, 벨리니, 도니제티 등 도전하고 싶은 레퍼토리도 너무 많습니다.”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소위 5대 오페라 극장을 섭렵해야겠다는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소리가 무르익을수록 인생도 원숙해지는 법.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살아보니 삶은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는 임세경 씨. 대신 어디에 서든 자신이 선 무대가 최고라는 자부심을 갖는다.
“무대를 이겨야겠다, 그래서 더 큰 무대에 서겠다는 욕심이 노래에 스며들면 관객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하는 사람은 무대에 부정적인 에너지를 실으면 안 돼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영혼이 맑아야 합니다.”
천상의 소리란 인간의 의지에서 길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성대를 빌어 울리는 아름다운 영혼의 연주라는 의미이리라. 5월 미국 워싱턴 케네디홀에 이어 이탈리아 베로나 페스티벌과 핀란드, 스페인, 독일, 일본 등 차례차례 임세경 씨를 기다리는 무대들. 마음을 맑게 닦은 그에게서 울리는 아름다운 소리에 브라바(여성 독창자에 대한 찬사)를 외치는 기립 박수가 화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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