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한양제일리뷰대회 은상 수상작 (국제학부 김미영)
나는 곧 생명과학과 다중전공 3년 차가 되는 국제학부 4학년 학생이다.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들으면 놀라는, 특이한 조합이다. 이 ‘국제학 + 생명과학’ 트랙을 밟은 학우는 8년 전쯤에나 한 명 있었다고 교수님들께 전해 들었었다. 그 선배님 외에 몇 명이 더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만큼 국제학부에서 생명과학과 다중전공을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런에도 이 리뷰를 쓰게 된 것은 언젠가 나타날 다음 사람, 나아가 문과 학생인데 이과 전공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 만큼 ‘어느 교수님의 어느 강의가 어떻다’는 단순 강의평가 식이 아닌, 나만의 경험과 특수성을 살려 전반적인 장단점을 풀어내는 후기를 써볼까 한다.*
* 두 학문뿐만 아니라 학과 내 분위기의 차이가 매우 크다는 점도 흥미롭다. 하지만 그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나만의 편견일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배제하고 학문과 공부 자체에 대해 느낀 점을 위주로 쓰고자 한다.
단점
우리 학교 학생들은 흔히 다중전공을 ‘다전’으로 줄여서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의 제목 중 ‘다전’에는 많을 다(多), 싸움 전(戰)이라는 한자를 썼다. 어쩌다 보니 한양대에서 생명과학과 강의를 들은 건 작년 한 해에 불과하지만, 내게 그 두 학기는 치열한 싸움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고등학교 때부터 ‘수포자’였던 나로서는 비속어를 쓰고 싶을 정도로 힘든 부분들이 있었다. 입학 후 첫 학기부터 2년간 각종 과학 교양 강의를 들으며 이게 해볼 만한 싸움인지 간을 보고 나서 시작했음에도 그랬다. 지금도 내가 아직 학점이 박살 나지 않고 붙어있는 건 생물학이 이공계열에서 수학과 그나마 조금 동떨어진 분야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보여주는 일화 몇 가지를 간단히 소개해볼까 한다.
세포생물학2나 미생물학1 시험에 나왔던 문제 중 씁쓸한 기억으로 남는 것들이 있다. 한두 개씩 있었던, 공식을 적용해서 답을 구하거나 단위를 환산해야 풀 수 있었던 문제들이다. 나는 안 그래도 잘 모르는데 기억까지 녹슬어서 고등학교 1~2학년 때 배웠던 기초적인 지수나 방정식조차 어려워했다. 내용을 완벽히 간파하지 못했는데 그런 문제가 시험에 나왔을 때는 과감히 버리고 다른 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조금이나마 더 자신 있는 암기 내용에 승부를 건다고 생각하고 집중 공략하게 됐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내가 부족한 부분의 역량을 기르기 위한 노력은 덜하고, 오히려 원래 자신 있던 부분에만 더욱 힘쓰게 된 것이다.
내가 진학을 희망했던 해외 대학원들은 기초부터 탄탄히 쌓아야만 ‘생명과학 전공’이라는 타이틀을 달 자격을 갖춘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나 역시 그에 동감해서 졸업 요건을 채우는데 필요하지 않은 기초필수 과목 몇 가지를 들었다. 그 중 생물의 바탕이 되는 화학 과목으로 일반화학2를 들었다. 고등학생 시절에도 문과의 전형적인 수포자였는데 일반화학1조차 수강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게 가능했다는 게 지금도 신기하다. 순전히 당시의 좋은 동지와 자비로운 교수님 덕분에 학점을 건질 수 있었음을 확신한다.
지난 여름에는 랩실에 들어가서 짧게나마 기초적인 실험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에도 시약을 쓰는 단위를 암산하는 것조차 너무 못해서 사수 되신 선배님이 매우 당황하셨을 것이다. 나 자신이 얼마나 모자랐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돼서 슬프기도 하고, 그런 내게 배울 기회가 주어져서 감사하기도 한 시간이었다.
이처럼 나는 전반적인 수학/과학 베이스가 약했기 때문에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같은 양의 내용을 똑같이 익히는데 주전공 학생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렇다고 내가 그들보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학과 분위기에 대한 말은 삼가려 하지만… 그곳은 경쟁의 판이 다른 것 같다. 3학년 2학기에 공부 밖의 것들에 현혹되어 긴장을 좀 늦췄더니 성적이 수직 하락하는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물론 100% 내가 방심한 탓이지만, 예상했던 것보다도 타격이 훨씬 커서 그때 주전공 과목보다 학점 면에서 살아남기가 더 어렵다고 느꼈다.**
**물론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다.
장점
단점을 저렇게까지 늘어놓은 것만 보면 ‘그런 거면 왜 하지’ 싶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힘든 점보다 좋은 점의 비중이 더 크다고 생각해서 나는 다전을 선택한 것에 후회가 없다.
일단 두 학문 간 차이가 너무 큰 나머지, 그 자체가 너무 신선해서 공부할 맛이 난다. 시험 기간에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것 자체는 어떻게든 괴로울 수밖에 없었지만, 그 괴로움을 견디고 열심히 하려는 의지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새롭고 깊이 있는 내용을 배우는 즐거움이 컸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생명그랜드토토 과목에서 받은 A+가 주전공 과목에서 받은 것보다 훨씬 큰 성취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잘하는 것(제1전공)과 좋아하는 것(제2전공)이 다른 본인 특성상 이 점이 더욱 크게 느껴진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기분이 더 좋았다.
구체적으로 국제학부가 주전공이기 때문에 공부하기에 유리했던 점들도 분명히 있었다. 학계에서 생명그랜드토토 용어를 영어로 쓰는 경향이 있어서 영어가 익숙한 나로서 조금 더 익히기 쉬웠다. 특히 일부 강의의 교과서가 영어 원서였는데, 교과서 원문으로 비교적 쉽게 공부할 수 있다는 장점이 크다고 느꼈다. 교과서를 중고로 구할 수 없어 비싼 원서를 샀을 때는 그만큼 본전을 뽑을 수 있어서 괜히 뿌듯하기도 했다. 교수님께서 영어로 된 교과서나 PPT 자료를 활용하며 한국어로 가르치시는 강의도 여럿 있었는데, 같은 내용을 두 가지 언어로 배우는 효과가 있어 개념 자체도 더 깊이 이해하게 됐던 것 같다.
게다가 국제학부 학생이라면 해외에서 더욱 질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조금이나마 편하게 누릴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운 좋게 4학년 1학기에 교환학생 ‘막차’를 탈 수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도망치듯 귀국하기 전까지는 2달 동안 뉴욕 주립대에서 생명과학 강의를 대면으로 들었다. 그 학교에 다니면서 가장 크게 와닿았던 건
1) 교육 자체의 수준, 장비의 퀄리티, 실습의 기회 등 모든 것이 한국 학교와 비교 불가한 점
2) 그만큼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학습량, 과제의 강도(?) 등도 높다는 점
이 두 가지다. 영어를 구사할 수 없었다면 패스를 받기는커녕 강의 내용조차 따라가지 못했을 텐데, 교육의 질을 중시하는 나로서는 무사히 경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혹 나와 비슷한 케이스 중에 교환유학 또는 석박사 유학을 희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현 시국이 끝날 무렵 시도해보는 걸 적극 추천한다.
마지막 장점은 요즘 그렇게들 강조하는 ‘융합형 인재’라 불린다는 것이다. 갈수록 과열되는 경쟁과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분야 간의 경계를 초월한 인재로 자신을 개발하는 것밖에 없다고 하는 추세이지 않은가. 이를 언급하며 칭찬해주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그들에게 감사하긴 하지만, 사실 이걸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 이유는 글의 뒷부분에 나온다.
맹점
이 절을 ‘맹점’이라 한 것은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그래서 알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장점인지 단점인지 구분되지 않는 영역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 맹점은 바로 ‘이렇게 다중전공을 하는 게 내 앞길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이다. 나는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3년째 찾아 헤매고 있다. 앞서 ‘융합형 인재’가 되는 것이 장점인지 모르겠다는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길이 과연 탄탄대로가 맞는지, 먼저 가본 사람이 있어야 알지. 독특하다고 꼭 좋은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생명과학을 공부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물론 취업보다 학문 자체에 대한 관심이 주된 이유였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때 내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특이한 학력을 발판 삼아 훌륭한 커리어를 만들어갈 길은 있다. 그런데 당시에는 내가 그 길을 나설 형편이 안될 수도 있다는 걸 감안하지 않아서 지금도 ‘앞으로 어떤 걸 하겠다’ 하는 확신이 없다. 그리고 그 확신의 빈자리에는 불안이 가득 들어차 버렸다. 나는 대학을 다닌 4년 동안 내가 쉼 없이 달려왔고, 분명히 남들 못지않게 열심히 산 것 같은데... 대학원이던, 기업이던, 기관이던 그걸 알아보고 인정해줄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불안이다.
그 불안감을 해소할 방법은 일단 해보는 것뿐이다. 대박일지 쪽박일지, 박을 타보기 전까지는 알 방법이 없다. 시험기간마다 치렀던 것은 산발적인 전투였다면, 이 ‘맹점’이 진정한 싸움이자 장기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결론
그런데도 나는 애초에 주전공보다 생물학에 대한 열망이 더 강했기에, 대학교에 다니면서 그를 공부할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쁘다. 살면서 지금만큼 다방면으로, 자유롭게, 마음껏 배울 기회가 다시 올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국제학부에서 생명그랜드토토과 다중전공을 고려하는 학생, 또는 문과 전공에서 이과 다중전공을 희망하는 학생이 아니더라도 본인이 원하는 공부를 할지 말지 고민하는 모든 이에게 감히 도전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내년에도 계속 발버둥 쳐야 할 테고, 시험 기간에는 괴롭다는 생각이 다시 찾아오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싸움은 내가 원해서 선택한 것이고, 그 선택에 걸맞은 노력을 하면 후회할 일은 없을 거라 믿고 있다. 한양대를 떠난 후 언젠가, 훌륭한 곳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더 좋은 후기를 남기는 날이 오길 바라며 글을 마치겠다.
해당 글은 한양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리뷰글 공모전 '2020 한양제일리뷰대회' 수상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