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토사이트 구 레드 올댓시네마 2 - 김한민 감독의
박찬승 (인문대·사학) 토토사이트 구 레드
"선후배가 함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 무대"
지난 26일 한국 영화 사상 최초의 기록이 탄생했다. 누적 관객 수 1600만 명 돌파. 역대 흥행 1위다. 김한민 감독의 ‘명량’이 세운 기록, 이 기록은 19일 만에 38일 동안 1330만 명을 영화관으로 이끈 ‘아바타’를 제친 것이라 더욱 놀랍다. 그렇다면 ‘명량’에 담긴 장면은 어디까지 사실이고 또 어디까지 허구일까. ‘교수님의 올댓시네마’ 그 두 번째 이야기. 박찬승 교수(인문대·사학)가 전하는 ‘명량’에 담김 역사 이야기다.
영화 ‘명량’을 가로지르는 역사의 맥(脈)
‘명량’은 1597년 임진왜란 6년, ‘명량해전’을 배경으로 한다. ‘명량해전’은 조선 수군 12척이 일본 수군 333척을 물리친 세계 전사에 빛나는 해전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최민식 분)이다. 이 밖에도 구루지마 미치후사(류승룡 분), 와키자카 야스하루(조진웅 분), 도도 다카토라(김명곤 분) 등이 등장한다.
원균을 비롯한 일부 서인 세력의 모함을 받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한 뒤 옥에 갇힌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당시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수군통제사를 맡은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해 조선은 다수의 장병과 대부분의 전선을 잃는다. 이에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권하기에 이른다. 이순신은 1579년 8월 18일 회령포에서 전선 10 척을 거둔 이후 2 척을 추가로 회수함으로써 12 척을 가지고 있었다. 선조는 칠천량 해전 패전의 손실이 커 수군을 폐지하려 했다. 이에 이순신은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수군폐지불가론’을 펼친다. ‘신에게는 아직 12 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죽을 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1597년 9월 이순신 장군이 선조께 올린 장계의 일부분이다. 그 후 이순신은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수군 재건에 전력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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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 수군은 구루지마 미치후사,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지휘하는 333 척의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명량해협을 통과해 전라도를 통해 일본 육군과 합류할 계획이었다. 명량해협의 조류는 국내 수로 중에서 가장 빠른 곳, 전술의 요지다. 일본 수군은 이 수로를 이용해 한양으로 진격하려 했다. 일본 수군은 전남 해남군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의 해협인 울돌목과 같이 조류가 세기로 유명한 시코쿠의 미야쿠보 지역에서 탄생했다. 명량해협의 지리적 특성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셈이다. 그런데 이미 1592년 한산도대첩에서 패배를 경험한 도도 다카토라와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순신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앞선 칠천량 해전의 승리가 일본 수군의 사기를 드높여준 탓에 이순신을 격파할 것을 결심한다. 한편, 명량대첩 직전 날인 음력 9월 15일, 이순신은 장병들에게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라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결의했다.
음력 9월 16일 오전, 일본 수군 333여 척이 울돌목으로 접근한다. 일본 대형 군선인 ‘아타케부네’는 협수로를 통과하기 어려워 중형 군선인 ‘세키부네’ 133척으로 조선 수군을 향해 진격했다. 이때 조류는 일본 수군의 진격 방향 흐름과 일치했다. 전투 시작 전 조선 수군 일부는 적의 기세에 밀려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순신의 대장선은 자리를 고수했다. 대장선이 적선에 둘러싸이자 초요기(대장이 장수들을 부르는 기)가 올라가고 중군장 첨사 김응함과 거제도 현령 안위가 전투에 가세한다. 전투 도중 적장 구루지마가 전사한다. 또 조류의 방향이 바뀌어 일본 수군의 진격 방향과 반대가 됐다. 좁은 해협에 많은 수의 전선을 끌고 왔던 일본 수군은 역류로 인해 자신들끼리 서로 부딪혔고, 조선 수군의 포격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결국 333척의 함대를 12척으로 추격하는 형세가 됐고 일분 수군은 퇴각한다. 실제 전투에 참여한 일본 수군 130여 척 중 30여 척이 격침됐다. 반면 조선의 전함은 하나도 격침되지 않았다. 이 전투는 결국 조선이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명랑’에 담긴 사실과 허구, 그리고 아쉬움
역사 속 조선 수군의 승리 요인은 선박 건조능력, 전함의 강도, 함포를 들 수 있다. 당시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오랜 기간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온 탓에 선박건조능력이 일본보다 앞서 있었다. 일본의 조선기술은 작은 범선으로 계절풍을 타고 해상을 왕래하는 수준이었다. 당시 일본 전함은 첨저선으로 배 배닥이 뾰족하고 판자의 연결에 쇠못을 사용한 ‘아타케부네’고, 조선의 전함은 배 바닥이 둥글고 나무못을 사용한 판옥선이었다. 또한 판옥선의 크기는 일본군의 가장 큰 배인 ‘아타케부네’보다 컸다. 평저선인 판옥선은 첨저선인 일본의 전함보다 회전이 용이했다. 반면 왜선의 쇠못은 녹이 슬어 부식돼 불안정했으며 충격에 약해 쉽게 파손됐다. 또한 함포는 임진왜란 전체를 통틀어 조선 수군에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다. 조선 수군은 다양한 종류와 구경의 화포를 사용했다. 반면, 일본 수군 역시 화포를 사용했으나 조선 수군에 비해 사용이 서툴렀고, 일본 수군의 함포 적재량이 조선 수군에 비해 열세였다. 박 교수는 이 밖에도 울돌목의 지형과 시간에 따른 조류의 변화를 이용한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략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병사들의 용기도 승리의 한 요인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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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박 교수는 ‘명량’에 담긴 장면에는 실제 역사와 다른 장면이 많다고 전했다. 상업 영화의 특성 상 흥행이 목표이기 때문에 각색된 장면이 많은 탓이다. 영화에서는 일본 군사들이 이순신의 대장선으로 건너가 칼과 창으로 싸우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런데 실제 명량해전에서 백병전은 없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대장선에 일본 군함 3척이 둘러싸지만, 실제로는 대장선에서 일본군이 다가오지 못하게 화포를 쐈기 때문에 배를 붙이지도 못 했습니다. 당시 화포 기술은 조선이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또 배를 붙인다 한들 일본 배의 규모가 작아 건너갈 수 없었죠. 역사 기록에 따르면 조선 수군의 배는 일본 군함보다 1m이상 높았다고 전해져요. 일본 군선에서 평평한 다리를 걸 수 없었다는 것이죠.” 이어 박 교수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마지막 한 척의 거북선과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순신 장군을 시해하려는 장면도 허구라고 했다. “이전 전투에서 거북선은 모두 파괴됐습니다. 또한 배설이 도망간 것은 사실이지만 이순신을 살해하려는 시도는 없었죠.” 이 밖에도 명량으로 출전하기 전 우수영을 불태운 것과 이순신이 직접 탈영병을 처형한 것도 사실이 아니란다. 또한 정탐꾼으로 등장하는 임준영(진구)도 명량해전 후에도 살아남아 정탐 활동을 계속했다고 전해진다.
이어 박 교수는 만약 포함됐다면 영화의 감초로 작용했을 역사적 장면을 말했다. “백성들은 어선을 끌고나와 이순신 함대 뒤에 도열해 조선 측의 군선이 많은 것처럼 적을 속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또 영화 속에서 이순신을 제외한 장수들은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죠. 하지만 당시 각지에서 모여든 이순신 장군의 부하들은 전투에 매우 유능하고 용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표현됐다면 더욱 감칠맛 나는 영화가 됐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명량해전이 있은지 한 달쯤 뒤에 이순신 장군의 16살 된 둘째 아들이 충청도 아산에서 왜군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소식은 이순신에게 ‘통곡’이라는 글자가 쓰인 편지로 전해지죠. 영화가 끝나고 ‘이 사건이 영화의 마지막이 됐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순신의 용맹함과 반대로 그의 인간적인 불행을 보여줬다면 관객들에게 더 큰 감동을 주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할 수 있었지 않을까요.”
‘진정한 역사는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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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교수는 영화 ‘명량’에 대해 한 마디로 평했다. “영화는 영화일 뿐 역사가 아니”라는 것. 각색도 물론이거니와 영화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소품이 사실과는 다른 경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고증(역사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시대, 가치, 내용 등을 증거에 기초해 이론적으로 밝힌 것)이 지켜지지 않는 것이 아쉽다는 설명이다. 박 교수는 시나리오 작가들이 고증을 위해 자문을 많이 구함에도 아쉬운 부분들이 남기에 사극의 콘텐츠를 그대로 믿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영화 ‘군도’에는 강동원이 하정우에게 청부 살인을 지시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하정우에게 스무 냥을 건네는데 당시 1냥은 엽전 100개에 해당합니다. 역사 속에서 이런 정도의 고액은 어음으로 거래됐습니다. 이 같은 기본적인 사실의 고증이 지켜지지 않으면 자칫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 할 수 있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해요.”
다행히 이런 기본적인 부분에서 영화 ‘명량’은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배의 특징과 의복까지 나름대로 고증에 충실하려는 제작한 노력이 엿보인다고도 말했다. ”영화 ‘명량’의 장면 중 군함이 지나가는 모습을 물 속에서 찍은 장면이 있습니다. 이 장면은 당시 조선과 일본 배의 특징을 보여주기 위한 장면이죠. 작가들이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영화는 영화이고 역사는 역사입니다. 영화에는 윤색과 왜곡이 정말 많죠. 진정 역사로서의 명량해전이 궁금하다면 임진왜란에 관한 역사 책을 읽어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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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슬옹 학생기자 kjkj3468@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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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요진 사진팀장 loadingman@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