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운기 교수, 칼럼 '인각사 '일연 토토사이트 무소유' 수난기' 기고
12월 25일 자 「인각사 '일연 토토사이트 무소유' 수난기」 기사
고운기 ERICA 문화콘텐츠학과 교수가 12월 25일 자 <한국일보>에 칼럼 '인각사 '일연 토토사이트 무소유' 수난기'를 기고했다. 고 교수는 경북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 비에 얽힌 이야기에 대해 소개했다.
고 교수는 일연(一然) 비문의 마지막 구절을 소개하며 “겁화(劫火) 속에도 의연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눈에 밟힌다”고 표현했다. 인각사 보각국사 비는 몽골과의 전쟁을 치른 직후인 1295년에 세워졌다. 그에 따르면 비문은 앞면의 일연 일대기를 비롯해 뒷면의 건립기까지 무릇 3,500여 자의 긴 글이었다. 이를 모두 왕희지의 글씨에서 한 자 한 자 찾아내 모았다. 이른바 집자(集字) 비문이다. 그는 “그것을 오석(烏石)에 새겨 세우니 비석은 호사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고 교수는 “그런데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며 “이 비석에 닥친 ‘화’는 세상 삼킬 불길이 아니라 신필을 탐내 두드리는 탁본의 방망이였다”고 전했다. 1760년경의 기록에는 인각사 불전 밑에 깨진 비석이 10여 개 뒹굴고 있다고 했다. 탁본 노역에 시달린 스님들이 더는 못 하겠다고 일부러 파손해 버렸다는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서서는 절집도 거의 무너지고 자취를 찾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1890년경의 기록은 어느 일족이 절터를 제 집안의 묫자리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비석이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1927년이었다. 안진호라는 사람이 비석의 근황을 찾아 소개한바, 조각나 방치된 덩어리조차 안 보여 알아보니 아예 깨트려 벼루 만드는 데 써버렸다는 것이다. 고 교수는 “고귀한 뜻을 실어 비석은 역사처럼 우뚝 섰으나, 넘어트리고 조각내고 깨트린 손길이 배신의 세월처럼 서글프다”고 했다.
고 교수는 “물건이야 때 되면 사라진다”며 “그러므로 사라져서 서글프기보다 맥락 없는 파괴가 무심해 아프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피 흘려 세운 제도 또한 무지와 몽매 속에 무너지기 쉽다”며 “정녕 분발해야 할 새해가 다가온다”고 전했다.